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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술국치 100주년과 역사의식(이만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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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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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7 09:59:57, Hit : 1,706, Rec. : 181 |
KPI 칼럼
'경술국치 100주년'과 역사의식
이만열 (한반도평화연구원 고문, 前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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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용어도 다양하여 ‘경술’(1910)년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국치 100년’이라고 쓰기도 하고, 또 ‘강제병합 100주년’이라고도 한다. 용어가 어떻든 500년 이상 지탱되어 오던 조선왕조[대한제국]가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것이다.
‘국치 100년’을 맞아 여러 가지 학술회의와 행사가 있었다. 8월 들어 그런 행사는 거의 매일 열리고 있다. 그만큼 의미있게 100주년을 보내자는 뜻일 것이다.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대로 갖지 못한다고 한다.
‘국치 100년’의 역사의식은 자연히 ‘국치’의 원인과 그로 인한 휴우증을 돌아보게 하고, 나라를 되찾은 후 ‘국치’에 대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는가를 묻게 된다. 따라서 이 글은 그런 순서를 따라 간단하게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나라의 치욕, 왜 당했을까.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이라는 새 간판을 단 지 14년만에 ‘한일병합조약’이라는 한 통의 문서에 의해 멸망했다. 1910년 8월 22일에 이완용(李完用)과 테라우치(寺內正毅) 사이에 맺어진 조약과 그 한 주일 후에 공포된 순종 황제의 칙유(勅諭)에 따른 것이다. 나라가 망했는데도 그 날은 조용했다. 문서 한 통으로 나라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은 윗자리에 있던 몇 몇 뿐이었고, 백성들은 그 전에 자신들을 옭아맨 여러 법과 제도에 의해 국가흥망 문제를 즉각 인식하는 데서는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다.
청일전쟁 후에 일본과 러시아는 한국과 만주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권리를 갖고 만주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독점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거기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를 갖자는 것이 일본의 계획이었다. 러시아는 오히려 만주에 대한 권리를 배타적으로 갖고 한 반도에 대해서는 일본의 독점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도 어느 정도의 지분을 갖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상충되는 두 이해당사자는 외교적인 노력이 실패하자 일본은 1904년 2월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고 인천과 여순 근해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다. 이에 앞서 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1904.1.21)했으나 2월 23일 일제는 한일의정서를 늑약하고 한국에서 군사요지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이어서 8월에는 제1차한일협약을 강제하여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고문을 한국이 고빙토록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은 그들이 추천하는 고문관을 통해 한국 정부의 행정에 관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전쟁 상황은 예상과는 달리 일본이 연전연승했다. 러시아의 긴 보급로는 대일전쟁에서 매우 불리했다. 전쟁에 임하는 태도도 일본이 사생결단으로 덤빈 데 비해서 러시아는 ‘저녁식사를 대하듯한’ 입장이었다. 의주․안동 패배에 이어 러시아는 여순항을 빼앗기고 봉천 전투에서마저 패배했다. 러시아는 흑해 함대가 움직이기 어렵게 되자 발틱함대를 투입, 반전을 꾀했으나 그마저 1905년 5월 27～28일 대한해협에서 일본 해군에 궤멸되고 말았다. 양국이 전쟁에서 피로를 느끼고 있을 때 미국이 중재에 나섰고 포츠머스 조약(9.5)으로 이어졌다.
이에 앞서 일본은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대화(7.29)를 통해, 영국과는 제2차 영일동맹(8.12)을 통해 한국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런 국제적인 승인을 배경으로 1905년 11월 18일에는 을사늑약을 강행,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고종은 비밀외교를 통해 빼앗긴 외교권을 회복하려 했지만 1907년에 이르러 헤그밀사 사건으로 더 곤궁한 입장에 처하고 말았다. 밀사파견의 책임추궁을 당하면서 고종은 떳떳하지 못했고, 이토오의 압력과 부화뇌동한 이완용 내각의 폐위결정에 맥없이 황제자리를 내 놓고 말았다(7.20). 이어서 행정권을 빼앗는 한일신협약(7.24)과 부속문서인 군대해산 밀약문서에 따라 8월 1일을 계기로 대한제국 군대도 중앙의 시위대, 지방의 진위대 할 것 없이 차례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외교권과 행정권, 국방권마저 빼앗긴 데다 사법권(1909)과 치안권(1910.6)마저 차례로 강탈당한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2일에 밀약된 강제병합 조약이 8월 29일에 공포됨으로 519년간 지속되어온 조선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나라가 왜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한 왕조가 멸망할 때에 그 원인이 어떻게 단순 명쾌한 한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까마는 여기서는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당시 한국은 국제 사회의 움직임에 너무 무지했다는 것이다. 1876년 일본과 근대적인 국교를 트고, 그 6년 후인 1882년에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서양 여러 나라들과 외교통상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 즈음부터 중국, 일본 등과의 종래 사대교린(事大交隣) 외교에서 벗어나 국제공법체제에 들어서게 되었다. 국제공법을 이해함도 제국주의적 침략의 본질을 이해하기보다는 윤리적인 측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일본이 중국 영국 미국 러시아의 동의를 한국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을 인정받으려고 외교권을 강탈하려고 하는 데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한국이 미국에 미련을 대고 거중조정을 낙관하고 있을 때 일본은 미국과 가쯔라-태프트 밀약을 성사시키고 있었다. 이렇게 국제적 움직임에 둔감했기 때문에 국제적인 이해관계를 앞세워 침략하고 있던 일본을 대항할 수 없었다.
둘째, 민권을 신장하여 국권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실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라의 힘이란 국민적 에너지의 통합에 근거해 있다. 국민의 힘은 민권을 강화시킴으로 성장할 수 있다. 동학혁명을 통해 19세기 초부터 성장한 민중의 힘이 표출되었을 때 봉건왕조는 백성의 힘을 외세로써 억누르려고 했다. 청을 향한 병력원조 요청은 일본군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자생적인 민권혁명은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다. 힘이 들지만 봉건정부는 외세를 끌어들이지 말고 동학민중 세력과 협상하여 민권의 사회세력화를 통해 국권을 강화시켜야 했다. “파리코뮌 72일에 비하면, 동학세력은 집강소를 통해 호남 53개 군을 6개월간 다스렸는데” 이 건 성장하고 있던 민중적 세력의 자치능력화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한계는 있었지만, 독립협회운동이 민권강화를 근거로 국권수호로 나가야 한다는 방향을 잡았을 때 봉권세력은 그걸 수용해야 했다. 1910년을 두고 본다면 동학혁명, 독립협회운동은 16-14년의 시간이 있었고 이 시간을 활용했다면 우리 역사를 국치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봉건지배층은 민권강화의 시대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황제권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것이 계몽군주제가 갖는 부국강병을 목표로한 것이었고 또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는 성과를 일정하게 나타냈다 하더라도 주권재민의 국민국가를 이룩하는 방향과 일치된다고는 할 수 없었다. 민권을 신장시키지 않고 민권과 봉건권력을 분리시켰던 결과 문서 몇 장에 꼭대기의 도장만 받으면 나라는 얼마든지 결단내는 구조로 몰고갔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을사늑약과 강제병합조약에서 ‘황실의 안녕’만 보장하면 민초들은 젖을 담을 수도 있는 식민지적 상황은 별다른 저항없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가시지 않은 일제강점의 후유증
일제 강점의 식민지적 지배는 세계사상 어느 정도였을까. 흔히 일제 강점기에 대해 망언하는 일본의 정치인들 중에는 일제의 한국지배가 서구의 식민지지배보다 훨씬 온정적이었고 문명적인 것이었다고 강변한다. 일제의 한국 강점과 관련한 망언들에는 1904년 이후의 한일간에 맺어진 조약들이 합법적이었고 또 1910년 이후 일제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내용도 있다. 한국 강점 후 일제는 자신들이 ‘한국의 개혁(Reformation)’을 위해 힘쓰고 있다는 것을 보고서를 통해 매년 해외에 선전하기도 했다. 이미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더 언급하지 않겠지만, 한일간의 강제조약의 불법성과 35년간 ‘개혁과 근대화’를 표방하면서 저지른 일제의 수탈과 착취는 서구의 어떤 식민지배보다도 더 악랄했고 거기에다 민족말살까지 감행한 범죄적 행위였다.
일제 강점은 한국의 전통을 해체하였다. 그리하여 자체의 내재적인 힘으로 순리를 따라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파괴해 버렸다. 내재적 힘의 원천인 전통은 파괴되었고, 새로운 가치관의 성립기반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일제는 한국의 문화적 토양과는 어울리지 않은 ‘식민지근대’를 이식했다. 일제에 의해 파괴된 전통은 해방 후 미소의 한국 진주로 2중적인 파괴를 맞게 되었다. 한국이 그런 식민지적 잔재와 서구적인 이식문화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통의 재발견을 통해 자기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려고 몸부림치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을 요하게 되었다. 아직도 일제의 잔재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고 전통의 비판적 복원에는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일제 강점의 후유증 중 가장 심각한 것은 한반도의 분단이다. 일제가 한국에서 물러날 때 그 무장해제를 위해 그어진 선이 6.25전쟁을 거쳐 오늘날 휴전선으로 굳어졌다. 분단으로 인해 1천만 이산가족이 양산되었고 전쟁은 남북한 민생은 물론 세계의 숱한 젊은이들을 이 땅에서 산화시켰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다 아직도 분단국가로 존재하면서 식민지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심각한 후유증에 대해서 일본은 무감각하다. 자국민의 인권에 대해서는 남다른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식민지시기의 인권탄압과 갖은 학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또한 일본이다.
식민지의 후유증은 아직도 교과서 등을 통해 돌출하고 있는, 한국사왜곡을 포함한 식민주의사관을 빼놓을 수 없다. 식민주의사관의 극복이 없기 때문에 일본 지도자들의 망언이 계속되고 교과서 왜곡은 되풀이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일본군 성노예의 문제와 원폭피해자 문제, 사할린 동포와 BC급 전범의 문제, 일본 야스쿠니에 안치된 한국인 영령 문제와 문화재 반환의 문제 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문화재 정보에서 소외되어 있던 우리를 향해 왜 한일회담 때에 제대로 요구하지, 지금 와서 그러느냐는 식이다. 차제에 총독부의 법적 근거를 벗어나서 반출되었거나 장물처럼 옮겨간 한국의 문화재는 반환되어야 한다. 일본에는 그 이동과정을 소명할 수 없는 많은 한국문화재가 있다. 일본이 문화국가요 문화민족이라고 한다면 반문화적인 그들의 행위를 더 이상 변호하거나 고집해서는 안된다.
한일지식인 공동성명 및 양국 시민단체들의 요구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을 맞는 올해, 한국 정부가 조용한 것과는 달리, 새로운 한일관계를 모색하려는 시민단체들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올 5월 10일에는 200여명의 한일지식인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7월 28일에는 1,118명이 서명한 그 공동성명을 일본 정부에 전달하는 설명회도 가졌다. 이어서 8월 15일에는 한일기독교회(NCCK, NCCJ)의 성명이 있었고, 8월 22일에는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가 1천여명이 도쿄 도시마공회당에 모여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수립을 위해 6개항에 걸친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앞서 언급한 이 세 움직임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내용은 한일강제병합조약(1910.8.22)의 원천무효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한일지식인공동성명은 먼저 한일강제병합의 침략적인 과정이 불의부당했다는 것과 한국식민지화를 법적으로 보장한 강제병합조약도 불의부당했음을 지적했다. 그들의 표현을 빌면,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하듯이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공동성명은 또한 해방 후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1965.6.22)의 제 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는 조문의 해석 문제를 두고도 일본측이 해석해온 ‘이미’의 기점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시라고 하는 해석이 무리라고 지적하고 앞으로는 한국측 해석(원천무효)으로 일원화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월 15일에 발표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J)도 1910년 8월 22일에 늑약한 강제합병조약의 원천무효를 주장했다. 공동성명은 “일본에 의한 100년 전의 강제 합병은 위협과 무력에 의한 불법적인 행위이므로, 한국과 일본의 국회는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이 원천 무효이고, 35년간의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었으며, 그 기간 중에 한반도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에 대한 식민지 치하 법에 의한 처벌이 전적으로 '인도주의에 반하는 식민지 범죄'였음을 확인하고 결의할 것”을 주장했다. 이 공동성명은 요구사항 6개를 열거하고 있지만, 맨 먼저 주장하는 것은 “강제병합 조약의 원천무효”다.
10월 22일 한국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 실행위원회도 15개 시민단체 회원, 시민과 한국측 실행위원회 공동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시민공동선언대회’를 열고 ‘식민주의 청산과 평화실현을 위한 한일시민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실행위원회도 “일본이 군사적 협박하에서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비롯한 4가지 조약과 한일합병조약은 불법·무효”라고 성명했다. 공동행동 일본측 공동대표인 이토 나리히코 주오대 명예교수는 “최근 간 나오토 총리가 사죄한다고 밝혔지만 병합조약의 강제성과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허언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일지식인 공동성명을 비롯한 여러 NGO들이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은 100년전 이완용과 데라우치(寺內正毅)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의 원천무효를 주장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한일기본조약 제 2조의 ‘이미’의 기점을 두고 한국측은 그 조약과 협정의 성립당시부터라고 주장함으로 원천무효임을 주장한 데 반하여 일본측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무효로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측 주장은 1945년까지의 그들의 한반도 강점을 국제법적으로 합법화하겠다는 것이다. 한일지식인 공동성명과 다른 두 NGO도 조약들의 원천무효를 주장함으로 한일기본조약 제 2항의 해석을 과거 한국 정부가 주장했던 주장을 지지했던 것이다.
이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위해 맨 처음 수행해야 할 과제는 분명해졌다.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을 원천무효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이끌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다. 이를 계기로 꼬인 한일관계가 재정립될 수 있다면, ‘강제병합 100년’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의미있는 해로 기념될 것이다.
식민의 분노를 자산으로 승화하여 역지사지하는 성숙한 공동체를 이루자.[이 부분은 지난 8월 14일자 경향신문에 발표한 칼럼을 약간 개고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지난 10일,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총리 담화’를 발표했다. 일제의 ‘강제병합’이 한국인의 뜻에 거슬려 이뤄졌고 한국민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한다”고 했다. 이 담화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은, 정부를 제외하고는, 냉랭한 편이다. 간 총리의 담화가 1995년 무라야마 총리 담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고, “참으로 실망스럽다”는 논평도 있었다. 몇 차례에 걸쳐 한일간 조약들의 원천무효화를 주장하면서, 일본정부가 솔선하여 이를 선언하도록 강조한 바 있는 필자 역시 실망했다. 죄책고백이 근원적일수록 용서와 화해의 길이 더 깊고 넓게 열린다는 것을 일본인들이 모르는 걸까.
‘강제병합 100년’은 일본과 한국을 위해서 대단히 좋은 기회였다. 이러한 호기(好機)를 살리지 못한 일본에게 죄책고백을 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차라리 우리 나름대로 식민지적 분노를 승화시켜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있는 에너지로 만들어갔으면 한다. 일본을 반면교사․타산지석으로 삼고, 그 분노를 생산적 동력으로 승화시킬 것을 고민하자는 것이다. 식민지 고통을 앙갚음의 동인으로 삼지 말고 세계를 향한 위로와 용기의 자산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오물쓰레기에서도 양질의 개스가 뿜어 나오듯이, 고통과 분노에서도 치유와 용서를 위한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원한을 복수의 근거로 삼는 한, 식민지적 오욕을 벗어나기 힘들다. 차라리 그 오욕을 떳떳하게 마주 대할 때 제국주의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양생(釀生)할 수 있다. 그런 결단이 분노와 수치를 역지사지의 새로운 에너지로 동력화시킬 수 있다. 이집트 종살이와 광야 40년의 출애굽 노정을 역사의식화한 히브리민족이 그랬다. 그러나 그 고난의 시절을 역지사지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아랍과의 전쟁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식민지적 분노를 자산화(資産化)한다면 한국이 어디에서부터 역지사지해야 할까. 먼저 이웃과 불화하고도 ‘일본처럼’ 죄책고백과 배상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베트남 파병을 고민하게 된다. 그 때 파병은 어쩔 수 없는 국제관계에서, 그럴듯한 명분을 갖고 실현되었다. 그러나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그 점에 대해 아직도 정식으로 속죄하지 않았다. 일본에 대해 속죄와 배상을 요구하면서도 베트남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면 그 이중적인 태도와 뻔뻔함에서 일본과 다를 바가 없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8월 한국-베트남 정상회담에서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으로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사과한 적이 있으나, 국가적 차원의 책임을 이행한 적은 없었다.
식민지적 고통을 경험한 우리가 외국인근로자들을 학대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민족 차별을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제3세계의 외국인근로자들을 차별한다는 것은 식민지적 학대와 소외를 뼈저리게 경험한 민족으로서는 용납못할 일이다. 일본의 만행을 비판하면서 일본이 행했던 민족차별 행위를 답습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반역이다. 식민지 경험을 역지사지한다면서 지금 식민지적 고통과 분노를 겪고 있는 제3세계인에게 냉담해서도 안된다. 나누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을 늘리고 희생․봉사 정신이 투철한 한국국제협력단(KOICA) 요원을 세계 곳곳에 파견,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북한과 제3세계에 대해 인도주의적 지원을 늘려야 하는 것도 식민지적 분노를 소중한 자산으로 승화시킨 공동체가 수행할 과제다.
백범 선생은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고 간곡히 말한 바가 있다. 역지사지의 심정이다. 내가 고통을 겪었기에 남의 고통을 덜어주는데 앞장서야 하고, 내가 아픔을 당했기에 그 아픔으로 남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국치100년’이란 역사가 더 이상 고통과 분노의 온상으로 남겨져서는 안된다. 그 고통과 분노를 공동체의 값진 자산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세계사적 사명을 깨닫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칼럼게재일 2010. 08. 27)
* KPI(한반도평화연구원) 웹 저널에서...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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